숙의 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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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중종의 후궁 [편집]
조선 중종의 후궁 숙의 나씨 | 淑儀 羅氏 | |
출생 | 1489년(성종 20년) |
사망 | |
나주(羅州) | |
부모 | 부친 나숙담 모친 영산 신씨 |
부군 | |
자녀 | 자녀 없음 |
묘소 | |
1.1. 개요 [편집]
1.2. 생애 [편집]
1514년(중종 9) 10월 5일, 만삭의 몸이었던 숙의 나씨는 정신을 잃고 혼미해지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아서 출궁하게 하였다.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경빈 박씨도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1] 이때문에 궁궐 안에서 사람이 죽는 일을 거리껴 '피방'이라고 하여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난산이어서 숙의 나씨는 아이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나씨의 소식이 알려지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잇따라 나씨를 돌본 의원과 의녀들을 탄핵하였다.
우선, 의원과 의녀들이 나씨의 상태를 보았는데도 손 쓰지 않았고, 아이가 살아있었는데 죽게 하였다는 죄였다. 당시의 사관도 '박씨에게 아부하면서 나씨를 전혀 구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2]
우선, 의원과 의녀들이 나씨의 상태를 보았는데도 손 쓰지 않았고, 아이가 살아있었는데 죽게 하였다는 죄였다. 당시의 사관도 '박씨에게 아부하면서 나씨를 전혀 구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2]
사신은 논한다. 처음에 나씨가 난산(難産)이 되어 병이 위급하니, 궁중(宮中)이 떠들썩하면서 숨졌다는 말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밖에 나가도록 명하였으며, 나가서 해산(解産)하니 아이는 생기(生氣)가 있었으나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그때 사람들이 슬퍼하고 상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해산할 수가 있었다면 생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니, 처음에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모자(母子)가 혹시 보전(保全)될 수가 있었는데 강박해서 밖으로 내보내어 이런 사고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궁중에 사설(邪說)과 구기(拘忌)가 있어서 임금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조선왕조실록》 중종 9년 10월 17일
그러나 중종은 "나 숙의는 구제할 수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궁중에 있을 때 이미 숨어 끊어진 것"이라고 논란을 일축하였다. 하지만 숙의 나씨가 출궁할 때 고통스러워 하는 신음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중종의 말을 믿은 사람들은 없었다.
한편, 중종은 나씨의 출산을 도왔던 의녀는 다시는 궁중의 출산 일을 맡지 못하게 하고, 내관을 통해 은밀히 풍수를 아는 관원을 불러서 좋은 묫자리와 장례를 치르기 좋은 날을 알아보게 하였다.[3] 또한, 그녀가 출궁할 때 타고 갔던 가마는 흉하게 여겨 불태우라 명하였다.[4]
2. 조선 인조의 후궁 [편집]
2.1. 개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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